유동성 함정 1)이란 경제주체들이 돈을 움켜쥐고 시장에 내놓지 않는 상황. 즉 시장에 현금이 흘러 넘쳐 구하기 쉬운데도 기업의 생산, 투자와 가계의 소비가 늘지 않아 경기가 나아지지 않고 마치 경제가 함정(trap)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말한다.
금 리는 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지표다. 일반적으로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은 전보다 싼 이자로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기 때문에 투자와 생산을 늘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계도 낮은 금리 기조 하에서 저축을 하기 보다는 대출을 받아 소비를 늘린다. 투자와 소비가 늘면 고용과 생산이 증가하고, 다시 소비와 투자를 촉진하면서 경제 전체가 선순환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금리가 충분히 낮아지더라도 가계와 기업이 돈을 시중에 풀어놓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유동성 함정에 빠졌을 때다.
함정에 빠진 돈
'유동성 함정'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을 직접 목도한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가 붙인 이름이다. 그는 아무리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어도 경제주체들이 돈을 움켜쥐고 내놓지 않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현상을 돈이 함정에 빠진 것과 같다고 해 유동성 함정이라 명명했다. 그렇다면 금리가 계속 떨어지는데도 돈이 돌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 주체들이 미래의 경제 상황을 낙관하지 못해 소비가 얼어붙고 기업이 투자를 꺼리기 때문이다. 우선 경기 전망이 불투명하면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경기가 극도로 위축되면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를 해 본들 손해를 보기 십상이기 때문에 가계를 비롯한 경제 주체들은 현금을 금고에만 쌓아놓으려고 한다. 여기에 기업에 돈을 빌려줬다 떼일 것을 우려한 은행까지 대출을 삼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투자를 하기 위해선 향후 일정기간 투자한 사업이 순조롭게 굴러갈 것이라는 전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경기 전망이 어두워 본전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면 선뜻 돈을 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소비자 입장에서 경기가 악화돼 물가가 계속 떨어지는 디플레이션(deflation)을 예상한다면 지금 소비하는 것은 손해일 수밖에 없다. 가격이 떨어질수록 현금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되고 나중에 싼값에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특히 냉장고·TV 등 내구재 소비는 극도로 위축된다.
돈 은 경제에 산소를 공급해주는 혈액이다. 돈이 돌지 않아 '돈맥' 경화 현상이 발생하면 한 나라의 경제는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돈이 돌지 않으면 각국의 중앙은행은 ‘돈맥’ 경화를 타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지속적으로 내리고 통화공급을 늘리게 된다. 하지만 금리를 계속 내리다 보면 금리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수준(일반적으로 금리 0%, 즉 '제로금리'인 경우가 많다)에 이르게 된다. 결국 중앙은행은 쓸 수 있는 모든 정책수단을 상실하게 되고 경제는 유동성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일본의 장기불황과 미국의 금융위기
유동성 함정에 빠진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난 1990년대 제로금리를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린 장기 불황을 겪은 일본이다. 당시 일본은 경기침체 속에 부도기업은 증가하고 부동산 가격은 폭락해 연쇄적으로 금융기관까지 부실화되는 복합 장기불황이 이어졌다. 불황이 계속되자 일본은행은 불황탈출을 위해 금리를 낮추는 확장적 통화정책을 실시했다. 1990년에 6%대이던 금리는 1993년에 1.75%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1993년과 1994년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0.2%와 0.62%에 불과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경기 비관론이 팽배하고 디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모든 경제 주체가 투자보다는 현금을 보유하려는 유동성 선호 경향이 강해졌고 이는 다시 디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은행은 악순환을 깨기 위해 계속 금리를 낮춰 1995년 9월에 금리가 0.5%로 떨어지면서 사실상 `제로 금리 시대'가 도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은 1995년 1.94%, 1996년 2.82%에 그쳤다. 일본 경제가 바로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정책 대응 <자료출처: 매일경제신문>
일본은 2001년 고이즈미 내각 출범 이후 경제·금융개혁을 단행한 결과 2003~2007년 연 2%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유동성 함정에서 탈출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일본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2월 또다시 기준금리를 0.1%로 내리는 제로금리 정책을 단행하며 유동성함정이 얼마나 빠져 나오기 어려운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기준금리가 하락함에도 설비투자가 줄어 유동성함정의 조짐을 보였다. <출처: 매일경제신문>
미국은 일본의 전철을 밟았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2000년대 초반 경제에 낀 거품을 제거하기 위해 2004년 6월부터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해 1%대였던 금리를 2006년 중반 5.25%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자산 버블의 붕괴가 가져온 여파는 당초 FRB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부동산 보유자들이 거리로 나앉고 세계적인 금융기관들이 문을 닫거나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에 FRB는 2007년 9월 5.25%인 연방금리를 2008년10월 1%까지 인하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0~0.25% 수준까지 낮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08년 4분기 -5.4%를 기록한 데 이어 2009년 1분기 -6.4%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도 유동성함정에 빠진 것이다.
한 국도 2010년 7월초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0.25% 인상을 단행할 때까지 17개월간 기준금리를 2%로 유지했다. 이 때문에 한국 경제도 유동성 함정에 빠졌는가에 대해서도 잠시 논란이 있었지만 빠른 속도의 회복세를 보이면서 흐지부지됐다.
유동성 함정에서 탈출하려면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면 이론적으로 금리 정책은 더 이상 효과를 보기 어렵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Paul Robin Krugman) 교수는 유동성함정을 탈출하기 위한 해법으로 구조개혁, 재정정책, 비상식적 통화정책을 제안했다.
우 선 구조개혁은 금융시장을 뜯어고치고 서비스 부문의 규제를 완화함과 아울러 기업의 회계를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같은 구조개혁은 경제 전체의 체질을 개선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당장 수요를 진작시켜 경제를 유동성함정에서 탈출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선 확신을 주지 못한다.
다음은 재정정책이다. 통화정책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만큼 사회기반시설 투자와 실업수당 등 정부지출을 직접 늘려 일자리를 늘리고 경기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지출은 막대한 재정적자를 수반한다. 2009년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10%를 넘는 미국, 일본과 같이 더 이상 재정적자를 감당할 여력이 없는 국가는 쉽게 사용할 수 없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