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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자릿수 효과 [ Left Digit Effect ]

미국의 상점에 가면 대부분의 물건 가격이 ‘$12.99’와 같이 끝이 99센트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조금이라도 싸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이렇게 표기한다는 것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전략입니다. 카운터에 현금으로 13불을 주니 굳이 1센트를 거슬러주더군요. 그 1센트 어디다 쓰겠습니까? 아직도 제 저금통에서 십여 년이 넘게 빛을 못 보고 있지요. 이런 가격 표기로 말미암아 사장되는 동전 값이 판매 수익보다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수십 년을 이렇게 표기해왔으니 다들 게임의 법칙을 알 텐데, 무엇 때문에 굳이 이런 관행을 유지하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역으로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게임의 법칙이 정해졌으니 이를 어기고 가격표를 ‘$13’이라고 정직하게 붙이면 사람들이 과연 살까하는 의문도 살짝 듭니다. 그렇다면 ‘$12.99’와 ‘$13.00’이라는 가격표가 실제로 매상에 영향을 줄까요? ‘99센트’ 가격표에 질리도록 익숙해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미국의 소비심리학자인 케네스 매닝(Kenneth Manning)과 데이비드 스프로트(David Sprott)는 2009년 현재 아직도 이 전략이 통하는지 실험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피험자에게 $2.00과 $4.00짜리 두 개의 펜을 제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군에게는 $2.00 가격표는 그대로 두고 다른 펜을 1센트 할인해서 $3.99의 가격표를 붙였습니다. 나머지 군에게는 $4.00 가격표는 그대로 두고 다른 펜을 할인해서 $1.99 가격표를 붙였습니다. 그 결과 전자에서는 44%가 비싼 펜을 선택한 반면, 후자에서는 18%만이 비싼 펜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효과를 ‘왼쪽 자릿수 효과(Left digit effect)’라고 합니다. $4.00이 $3.99로 바뀔 때 실은 1센트 줄어든 것이지만, 바라보는 고객 입장에서는 마치 1불이 줄어든 것과 같은 효과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트릭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심리적 효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참 신기하지요. 사람들은 조금만 복잡해도 끝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노벨상을 탄 경제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다음 곱셈 문제를 5초 안에 풀어보라고 피험자에게 지시했습니다. 1×2×3×4×5×6×7×8,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를 주었습니다. 8×7×6×5×4×3×2×1, 물론 5초 안에 정확한 답을 하는 사람은 드물겠지요. 그래도 두 문제는 사실 같은 문제이고 답은 40,320입니다. 그런데 오답의 평균값이 묘합니다. 똑같은 피험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선 그 값이 512였던 반면,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선 2,250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피험자들은 문제를 끝까지 보지 않고 왼쪽 숫자 몇 개만 보고 답을 어림잡은 것이지요. 이는 ‘닻 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왼쪽 숫자 몇 개를 보고 나면 이후 숫자가 무엇이 나오든 간에 처음 입력된 값을 기준점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든 간에 정확성보다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우리 뇌의 설계 방식에 따른 결과입니다. 전자제품 대리점을 경영하시는 우리의 사장님께서는 왼쪽 자릿수 효과를 참으로 감명 깊게 받아들인 나머지 새로 나온 최신 3D TV의 가격을 ‘1,999,999원’으로 붙여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바로 옆 건물의 대리점에서 거의 동일한 모델을 ‘2,047,000원’에 파는 것에 대응하는 전략이었죠. 그런데 웬걸, 이상하게 더 비싼 가격표를 붙인 TV는 불티나게 팔리는 반면, 우리 대리점의 TV는 문의하는 사람은 많아도 잘 팔리질 않았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이는 ‘왼쪽 자릿수 효과’가 사장님이 생각하신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저가 상품인 경우, 또는 기존 가격에서 세일을 하는 경우 ‘$12.99’ 식의 가격표는 최대의 효과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 가격표는 상품이 염가 대량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기존 가격에서 몇 차례 할인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반면 ‘00’으로 끝나는 가격표는 상품이 그만한 가치가 있고, 가격이 합리적 근거를 통해 산출되었다는 전문성과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고가에다가 더구나 최신 모델인 3D TV를 싸구려 떨이 물건처럼 보이게 했으니 팔리지 않는 게 당연하지요. 또 한 가지 이상하게도 끝자리가 4나 7이면 유독 전문적인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가격표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숫자이기 때문에 역으로 그런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간혹 $1.74나 $294.00 같은 가격표가 붙습니다. 과거, 글자를 읽을 수만 있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곱셈, 나눗셈만 할 줄 알아도 남보다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고등 교육의 혜택을 입고 있지만, 문자와 숫자는 여전히 그 상징성과 마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홀리기도 하고 매혹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