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이 외로워합니다. 황혼 이혼으로 배우자에게 버림받고 살길을 찾아 나선 자식들에게 외면을 받은 노인들, 수익을 창출하는 기계로서 가장 가까운 직장 동료와도 은밀한 경쟁관계에 놓여야만 하는 직장인들, 가볍고 쉬운 이성 교제 속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맡길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 청춘 남녀들에게까지 외로움은 치유되지 못할 병처럼 뿌리 깊게 퍼져 있습니다. 일본 남성의 30%, 여성의 20%가 짝 없이 살다가 짝 없이 고독사한다는 충격적인 통계도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시작된 인생이지만, 끝날 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적막함 속에서 마침표를 찍나 봅니다. 외로움은 직접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우울증의 가장 큰 요인은 깊은 감정을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 역시 견딜 수 없는 외로움 때문입니다. 죽고 싶다는 심정의 토로는 들어줄 상대를 가정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순간에 들어줄 사람마저 없다면 행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심리학자 사라 프레스맨(Sarah Pressman)은 대학교 신입생이 느끼는 외로움과, 그들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력과의 관계를 조사했습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우울증이 동반되었던 아니던 간에, 단순한 외로움만으로도 인체의 면역력이 현저히 저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연구진들이 발견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들 신입생들이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활달한 신입생들은 갖가지 클럽에 속해 있었고, 많은 인적교류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관적 외로움은 사회 관계망의 밀집도와는 별 상관이 없었으며, 면역력은 친구의 수가 아니라 주관적 외로움의 크기와 반비례하고 있었습니다. 외로움에 대해서 수십 년째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시카고 대학의 존 카시오포(John Cacioppo)는 수많은 동료와 친구들 속에서도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는 현상을 조사했습니다. 그가 면담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에도 수십 번 이상 전화나 문자로 친구와 안부를 주고받았고, 공통의 관심사를 논할 수 있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시오포가 그려낸 이들의 초상에는 지울 수 없는 외로움이 가득합니다. 이들은 1년에 평균 48일 이상 지독한 고독감에 사로잡혔으며, 특히 옆의 친구가 외로워하면 자신도 외로워진다고 대답한 사람이 상당수였습니다. 카시오포의 계산에 따르면, 친구가 외로움에 시달릴 때 나 역시 외롭다고 느낄 위험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50%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위험 비율의 상승은 배우자나 가족보다 친구일 때 더 두드러졌으며, 남성보다는 여성에서 더 높았습니다. 정리해서 말한다면, 특히 여성인 경우 내가 외로워하면 내 친구들도 덩달아 외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외로움은 기존의 사회 관계망을 따라 마치 전염병이 전파되듯이 퍼져 나갑니다. 나의 외로움은 나만의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끔찍한 연구 결과입니다. 기존 이론에서 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그만큼 외로움에서 자유롭다는 증거였습니다. 설령 개인적 위기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외로움을 느낀다 해도, 많은 친구들은 이를 극복해내는 자극이자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넓기만 할 뿐 두께는 종잇장처럼 얇기만 한 현대 사회의 친구 관계는 외로움에 대한 방벽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위태롭게 기대고 있을 때는, 한 사람만 외로워져도 마치 카드로 만든 집처럼 전체 사회 관계망이 폭삭 주저앉아 버리는지도 모릅니다. 저 친구를 보면서 나는 외로워하지 말아야지 하고 억지로 버티고 있었는데, 믿었던 친구가 외로움에 주저앉으면 나 역시 쉽게 무너져버리는가 봅니다. 잘 아시다시피 외로움과 고독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종교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외로움과 면역 기능을 연구한 학자들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친구의 많고 적음도 아니요, 혼자 있는 경우가 많으냐 적으냐도 아닙니다. 오로지 스스로 외롭다고 느끼느냐 아니냐에 따라 아픔이냐 영광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통해 전염되는 어두운 병마 역시 외로움이지, 혼자 있는 것 즉 고독의 자족감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외로움을 고독으로 순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시대는 혼자 있음을 무엇보다 두려워합니다. 끊임없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해야만 하며,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인상과 생각도 그때그때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으면 참지 못합니다. 대신 자아를 타인으로부터 구획 짓고, 혼자만의 성을 쌓는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온 세상은 다 나의 마음속에 있으며, 내 마음속의 군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 마음속의 군중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고, 외로움을 지켜내는 방벽으로 이들을 이용할 방법을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 역시 친구를 많이 사귀어라, 단체에 가입하라는 식의 상투적인 조언만을 남발할 뿐이지 내면의 성을 키우고 가꾸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우울증을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지금까지는 구체적인 ‘친구의 숫자’만을 따져왔던 것입니다.학자들이 군중 속의 외로움을 새삼 발견해낸 것처럼, 멀지 않아 고독 속의 평화를 발굴해내리라 기대합니다. 점점 더 깊이는 얕아지면서 넓게 퍼져만 가는 사회 관계망 속에서, 고독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질 것입니다. ‘고독사’라는 말은 결코 옳은 용어가 아닙니다. 주위에 온통 가족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움으로 죽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아무도 없어도 고독 속에 영광스레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외로움이 전파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스스로의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개인의 선택 사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책임의 지위로 승격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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