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진료실 대기석에서 드물지 않게 보는 풍경입니다. 남편은 한사코 의사를 믿지 못하겠다면서 금방이라도 자리 박차고 나갈 기세고, 부인은 어떻게든 진료를 받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토록 부인 앞에서 기세등등했던 그 남자 분이 정작 진료실에서 의사 앞에 서면 고분고분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이런 병이 의심되고요, 자세한 진단을 위해선 이런저런 검사를 하셔야 합니다. 이름도 생소한 검사를 예닐곱 개 해야 한다는 말에 부인은 남편이 또 성질을 낼까 봐 마음 졸이지만, 웬걸 이 남자 분은 순순히 응하면서 검사 다 하겠다고 동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의사 선생님께 고맙다고 허리까지 굽히면서 진료실을 나옵니다. 의사가 너무 권위 있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진료실을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그 짧은 순간에 심정의 변화라도 일으킨 걸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심리학에선 이를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이 있습니다. 소위 ‘요구특성 효과(Demand characteristics)’라는 것이지요. 원래 이 용어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심리학자 마틴 오른(Martin Orne)에 의해 제기된 개념으로, 심리학 실험을 할 때 피험자가 무의식적으로 실험자가 요구하는 대답을 하게 되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요구하는 심리학 실험에서 이렇듯 피험자가 실험자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실험자 의도대로 행동한다면 얻어진 결과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효과는 심리학 실험의 객관성을 흐리는 부정적인 효과이지만, 사실은 대인 관계 속에서 폭넓게 적용되는 법칙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인과 상호작용을 할 때 언어로 소통되는 객관적 정보만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타인의 심리와 동조되는 현상을 보이며 이를 근거로 타인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여 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심지어 상대가 무심코 취하는 제스처조차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요. 이렇듯 두 사람 사이에 무의식적인 상호 동조가 이루어지면, 상대가 암암리에 내게 요구하는 바대로 행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거부하고 반대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앞서 예를 든 남편의 경우 부인과 대화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부인의 요구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갔었지만, 의사와 만나고 나서는 오히려 의사의 요구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나가게 된 것이지요. 이상하게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수없이 생각하면서도 그 사람 앞에만 나가면 마음이 약해져서 정을 주기도 하고,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 등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역시 상대의 요구에 순응하려는 무의식적 욕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과만 만나면 이상하게 내 태도가 삐딱해지고, 고자세가 되어 쉬운 일도 골탕 먹이고 싶어집니다. 이 역시 요구특성 효과랑 무관하지 않습니다. 일대일의 대인 관계는 물론, 집단에서의 역학에서도 내게 가해지는 무의식적 압력을 잘 파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요구에 민감한 분도 있고, 둔감한 분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요구에 순응 혹은 반항하려는 경향이 무의식에 머물러 있다면 원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지요.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 그것만 있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피해 갈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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