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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터마크 효과 [ Westermarck Effect ]

사람은 어떻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또 누군가는 절대로 좋아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요. 생물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적당한 계기와 상황만 만들어진다면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바로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입니다. 성()에 처음으로 눈뜨게 되는 사춘기 시절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상대는 바로 누이나 오빠이거나, 심지어 부모가 될 터인데 왜 이러한 사랑이 성립되는 경우는 그리 드문 것일까요. 물론 프로이트 박사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어린아이는 누구나 반대쪽 성의 부모에게 성욕을 느끼며, 발달 과정 중 강력한 근친상간 금기로 말미암아 이런 욕망이 억압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억압은 모든 신경증의 근원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진화학자인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재미있는 제안을 합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성욕을 느꼈던 것은 그가 유모 손에서 컸고 어머니는 하루에 한 번씩만 보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요. 저도 그 말을 들으니 그럴듯합니다. 도대체 벌거벗은 나를 수도 없이 씻겨주고 기저귀를 갈아주신 분에게 성욕을 느낀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춘기 성호르몬이 왕성하다고 해도 일방적인 성추행이면 모를까, 함께 자라나면서 온갖 미운 꼴 구린 꼴을 다 보고 난 남매가 서로 애정을 느낀다는 게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동물과 인간 모두에서 근친혼, 특히 남매간의 근친혼은 기껏해야 1% 미만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보다 더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사회적 관습에 의한 근친상간 금기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들 생각합니다. 이런 이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물학적 접근으로, 근친 교배에 의해 유전자 풀(pool)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라는 설명입니다. 프랑스 작가인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의 소설 《거꾸로(ARebours)》의 주인공 데제생트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입니다. 선조들의 초상을 보면 우람하고 험상궂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데제생트는 극도로 섬세한 신경과 감성을 가졌고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현실 생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위스망스는 이에 대해 이 가문이 근친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기력이 소진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근친혼이 가문의 기력을 소진시킨다는 이론은 완전히 틀리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근친혼이 반복되면 열성 유전자가 모이면서 유전 질환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또한 유전자 풀의 다양성이 줄어들면서 변화하는 환경에의 적응이 힘들어집니다. 이 때문에 근친혼을 꺼리는 성향을 물려받은 종만이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설명입니다. 두 번째 설명은 소위 ‘웨스터마크 효과(Westermarck effect)’라는 것입니다. 마치 각인 현상에서 설명한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처럼 유년 시절 중 일정한 기간을 함께 보낸 남녀는 서로 성적인 매력을 느끼기 힘들며, 대신 서로 도와야 한다는 이타적 감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남매간에 사랑에 빠져 혼인한 경우도 거의 대부분 어린 시절에 헤어졌다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사례들이었습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웨스터마크 효과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스라엘의 키부츠 동기들 간의 결혼률을 조사한 연구를 들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키부츠(kibbutz)라는 집단 공동체에서 양육됩니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떨어져, ‘Bayit Yeladim’이라는 집단 숙소에서 함께 먹고 자며 형제라는 의식을 키워가며 자라납니다. 따라서 한 키부츠에 속한 남녀 아이들은 모두 서로 남매처럼 친해지게 됩니다. 1965년 멜포드 스피로(Melford Spiro)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수천 건의 결혼 사례 중 한 키부츠에서 성장한 또래 남녀가 결혼한 경우는 수십 건에 불과했습니다. 에드바르드 웨스터마크(Edvard Westermarck)는 핀란드 태생의 철학자요 사회학자였습니다. 그가 이 이론을 발표한 것은 1891년으로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지 30여 년이 지났을 때요, 프로이트의 《성욕에 대한 세 편의 에세이》가 출간되기 15년 전이었습니다. 웨스터마크나 프로이트 모두 다윈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자연스러운 근친상간 터부가 있다고 주장한 반면 후자는 사회가 규약으로 정한 강력한 터부가 없었다면 누구나 근친상간에 빠졌을 것이라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한 셈입니다. 과연 진실은 어떤 것일까요. 프로이트의 생각은 애초에 본능적 욕구가 없었다면 왜 그렇게 강력한 터부가 생겼을까 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의 삶이 평생 이드와 초자아의 싸움이라고 규정한 그로서는 당연한 입장이었겠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근친에 대한 성욕이 강할 것이라 가정했냐고요? 그야 물론 어렸을 때는 상대가 그들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가 상상했던 이드의 세계에서, 인간은 성욕에 굶주린 나머지 어떤 대상이든 옆에만 있으면 가리지 않고 성욕을 풀고자 하는 존재인 셈입니다. 반면 웨스터마크는 오히려 어린 시절, 바로 옆에서 살 비비며 지냈던 것 자체가 성적 대상이 될 수 없게 막아주는 진화론적 지혜로 작용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프로이트에게 생물학은 인간이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한계인 반면, 웨스터마크에겐 생물학이 인간을 도와주는 지혜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끌리기는 하지만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리라는 느낌을 받는 것, 역으로 어떤 조건도 빠지지 않지만 전혀 끌리지 않는 것. 사랑이 힘든 것은 이러한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계속 엇갈리기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한번 이렇게 믿어보세요. 여러분을 그렇게 몰아가는 힘들 중 일부는 수십만 년을 거친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진화의 유산이라고요. DNA에 적혀 있는 알 수 없는 지혜가 우리를 혼란에서 구해주고, 실패를 막아주고 있는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