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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환영 [ Autoscopic Hallucination ]

2011년 상반기 영화계의 화두는 다름 아닌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과 영화 〈블랙 스완(Black Swan)〉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나탈리 포트만의 신들린 내면 연기 때문에, 이후에는 발레 대역이 대부분의 발레 장면을 소화했다는 폭로 때문에, 이 영화는 상당 기간 언론의 문화 면을 장식하였습니다. 어쨌거나 엄친딸 연기자인 포트만과 괴짜이자 천재 감독인 대런 아르노프스키(Darren Aronofsky)는 소심했던 소녀의 자아가 점차 분열되어 가는 과정을 날카롭게 그려내었습니다. 비록 이 영화가 처음에 마치 공포영화처럼 선전이 되는 바람에 많은 관객들이 ‘뭐가 무섭나’라고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영화의 후반 나탈리 포트만의 환영이 거울에 비치는 장면에서는 순간순간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주인공 니나(나탈리 포트만 분)는 분장실에서의 싸움 끝에 경쟁자인 릴리를 찔러 죽이지만 곧 피를 흘리는 것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중복되고 변용되며, 누가 나인지 내가 있기나 한 것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이 소용돌이처럼 숨 가쁘게 전개됩니다. 이런 장면은 소위 ‘자기 환영(Autoscopic hallucination)’이라고 해서 무척 역사가 오래된 현상입니다. 중세로부터 서양에는 ‘자기 자신의 환영을 보는 자는 며칠 내로 죽는다’라는 속설이 전해질 정도로 자기 환영은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17세기 작가 존 오브리(John Aubrey)는 수필집 《짧은 생애(Brief lives)》에서 이렇게 자기 환영을 보고 비명에 간 일화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1796년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장 파울(Jean Paul)은 도플갱어(Doppelgänger)라는 용어를 만들어 썼는데, 이후 이 용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더군다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셸리(Percy Bysshe Shelly)가 자신의 도플갱어를 본 후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 역시 수 없이 회자되었습니다. 물론 도플갱어를 두 번씩이나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수를 누린 사람도 있습니다. 다름 아닌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입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환영이 스스로에게 많은 위안이 되었다고 쓰고 있지요. 정신의학적으로 자기 환영은 그리 드물지 않은 현상입니다. 정신질환 혹은 뇌혈관 질환이나 간질 환자에게 주로 나타나며, 간성혼수()에서도 종종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는 뇌 기능의 일시적 이상에서 비롯되며, 2006년 스위스의 신경학자인 샤하 아르지(Shahar Arzy)는 뇌의 좌측 측두엽과 두정엽 사이를 경두개자기자극술(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로 자극하면 자기 환영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알고 보면 그다지 신비로울 것도 없는 현상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을까요?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나 영화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분신(The double)》이며, 이후 에드거 앨런 포, 랠프 앨리슨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노벨상 수상작가인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역시 《도플갱어(O Homem Duplicado)》란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들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주인공이 매우 도전적이면서도 소심하고, 자부심이 강하지만 속물적이어서 주어진 사회 관습의 한계를 넘어갈까 봐 노심초사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사칭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자신이 정말 어렵게 이룩해놓은 모든 사회적 기반을 잠식해나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분신이 나를 대신하며, 정작 오리지널인 나는 사회로부터 배척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골랴스킨은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되며, 사라마구의 소설 속의 주인공은 평상시 그답지 않은 잔인함을 발휘하여 복수를 행합니다. 이들 문학 작품 속에서 ‘자기 환영’을 본다는 것 혹은 분신의 존재를 직감한다는 것은, 내 무의식 속의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의 은유로 쓰입니다. 누구나 ‘나는 어떤 사람이야’라는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물론 타고난 자기 자신의 외모와 성격, 능력은 태어나면서 고정된 면이 있겠지만, 자기 이미지의 상당 부분은 사회로부터 강요된 모습을 안고 있습니다. 이렇듯 나와 사회의 공동 작업을 통해 형성된 나의 모습을 정체성 혹은 아이덴티티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바라본 나의 모습, 선생님들과 직장 동료들이 바라본 나의 모습은 바로 내 정체성을 이루는 데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성장 과정에서 나는 이러한 정체성에 부합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며, 그럼으로써 사회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직업은 물론 성격, 취향, 능력까지도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는 주위의 압력과의 타협으로 축조됩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계기로 내 속의 다른 가능성들을 직감합니다. 지금까지 억압된 모습들이 마치 꿈틀대는 용암처럼 분출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그림자들은 주로 외부 세계에 투사되어 나타나는데, 이 중 특별한 경우가 바로 분신 또는 자기 환영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분신들은 보통, 제정신에서는 내가 감히 행하지 못하는 일들을 저질러버립니다. 말하자면 내가 그리도 억압하려 애썼던 나의 숨겨진 모습이 사고를 치는 것이지요. 이러한 분신 혹은 도플갱어에 대해 신화나 문학은 두 가지 극단적으로 대립된 반응을 그리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학에서는 주로 도플갱어에 의해 파멸하는 주인공이 그려집니다. 이들은 도플갱어가 저지른 행위를 대신 수습하느라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상실하기도 하며, 또는 안정적이라 느꼈던 자기 정체성에 의심을 품으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반면 북유럽 혹은 그리스 신화에서는 좀 더 긍정적으로 그려집니다. 자기 환영은 조만간 내가 딛게 될 운명의 길을 미리 보여주기도 하며, 또는 내게 과감하고 단호한 행동을 취할 것을 강권하기도 합니다. 이를 순순히 따른 자는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데 성공합니다. 자기 환영을 본 자는 조만간 죽게 된다는 전설은 주로 프랑스 등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습니다. 짐작건대 질병 말기의 섬망() 상태에 처한 환자들이 자기 환영을 비롯한 다양한 환각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런 속설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해석한다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자신이 누군지 모르게 되면 파멸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정체성 상실이 육체와 정신의 사망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사회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의 노예가 되어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치 명예퇴직이라도 하고 나면 급격히 늙거나 병들어버리는 중년 남자들처럼, 명함에 박힌 내 이름과 그 앞의 내 직위가 내 생명을 담보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우울할까요? 유대인의 지혜를 담아놓은 《탈무드》에는, 자기 환영을 보는 것은 여호와를 만나는 것과 다름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내 분신은 나를 혼동시키고 위협하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의 전령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내게 자기 환영이 나타난다면, 아마도 “넌 누구지?”라고 묻겠지요. 그러나 이 물음은 “도대체 난 누구지?”라고 묻는 것에 다름 아닐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