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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의식 메시지

2007년 1월 27일, 음식과 요리 문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미국의 한 케이블 채널(Food Network)에서 요새로 말하면 〈나는 가수다〉 식의 요리사 경연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프로그램 중간에 화면 전체를 꽉 채운 맥도널드사 광고가 비춰졌습니다. 프로그램을 건성으로 보고 있던 시청자 중에는 눈치채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 장면이 나간 후 방송국으로 빗발치는 항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항의 전화의 대부분은 맥도널드와 케이블 채널이 잠재의식 광고를 시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케이블 채널은 기술상의 실수라고 해명했으나 이 사건은 거대 기업과 방송사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신을 불러왔으며, 잠재의식 광고에 대한 논란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잠재의식 메시지(Subliminal message)’ 혹은 잠재의식 메시지 효과란 무엇일까요? 이는 인간이 의식하지 못할 만큼 짧거나 미약한 감각 신호를 반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이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감각(sensation)과 지각(perception)이라는 두 가지 분리된 단계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눈이나 귀 같은 감각기관이 시청각 자극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감각이라 하는데, 감각된 신호는 즉각적으로 변연계에 전해져 감정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대뇌의 연합중추가 감각 자극의 의미를 파악하는 지각 과정은 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감각하기에 충분하지만 지각하기에는 모자랄 만큼만 아주 짧게 자극을 제시하면, 상대가 눈치채지 못한 채로 감정 반응이나 행동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이론적으로는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요? 피질 맹(cortical blindness)이라는 병적 현상을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눈이나 시신경에 아무 이상이 없어도, 시각중추인 후두엽에 손상을 입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님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손가락을 보여주며 몇 개인지 ‘육감’으로 알아맞히어 보라고 하면, 예상 외로 정확히 알아맞힙니다. 심지어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중풍 환자가 장애물들이 널려 있는 복도를 부딪치지 않고 무사히 통과한 사례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 그에게 보이지도 않는 장애물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이리저리 방향을 튼 것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잠재의식 메시지 효과는 일찍이 1895년에 제안되었으나,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1950년대 광고업계에서 이 현상의 응용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하면서입니다. 1959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심리학자 돈 바이른(Donn Byrne)은 피험자들에게 16분짜리 단편영화를 보여주면서 그 중간에 수차례에 걸쳐 ‘beef’라는 영어 단어를 천분의 5초 동안 보여주었습니다. 영화 상영이 끝난 후 피험자들에게 얼마나 배가 고프냐고 물었더니, 잠재의식 메시지에 노출된 피험자들이 그렇지 않은 대조군보다 훨씬 더 배가 고프다고 답을 했습니다. 잠재의식 효과를 유발하는 자극은 단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1992년 존 크로스닉(Jon Krosnick)과 동료들은 피험자에게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진을 보여준 후, 이들의 인상에 대해 평가해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사진을 보여주기 전에 극히 짧은 시간 동안 한 그룹에는 편안하고 행복한 장면을, 다른 그룹에는 무섭거나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과를 분석해보니 두 군 모두 동일한 사람들 사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잠재의식적으로 행복한 장면에 노출되었던 그룹은 사진 속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 밖에도 단순한 도형, 소리, 음악 역시 잠재의식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심리학자들이 실험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잠재의식 효과는 매우 미미했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마치 음모이론처럼, 광고 회사나 기업들이 소비 심리를 조작하기 위해 잠재의식 광고를 비밀리에 사용하고 있다고 믿으며, 심지어 국가나 정당이 국민들을 세뇌하고 선거 결과를 조작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효시가 된 윌슨 브라이언 케이(Wilson Bryan Key)는 1973년 펴낸 《잠재의식적 유혹(Subliminal seduction)》이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가능성들을 조목조목 나열합니다. 이와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한때 일부 헤비메탈 그룹의 노래에 사탄의 메시지가 거꾸로 녹음되어 있다는 기독교도들의 주장이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음반을 거꾸로 틀면 사탄을 찬양하는 가사가 들린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기법을 전문적 용어로는 백마스킹(backmasking)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의 비틀즈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유명 그룹들은 실제로 엉뚱한 메시지를 거꾸로 녹음하여 삽입하기도 했습니다.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의 주장은, 백마스킹된 메시지가 들어있는 음반은 올바른 방향으로 듣는다 해도 잠재의식 메시지 효과 때문에 감상자의 영혼을 타락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열성 기독교인들의 비난이 대부분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이 논란 이후 미국에서는 백마스킹 메시지가 들어있는 음반에는 이를 알리는 문구를 포함하도록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한편 수많은 광고 이미지에 숨겨진 성적 코드가 들어있다는 주장, 어린아이들이 즐겨 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도 노골적인 성 묘사가 들어 있다는 주장들이 일부 소비자 단체를 중심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성적 메시지가 소비자들을 흥분시켜 자신들의 제품을 선택하도록 유인하며, 어린이들의 도덕관을 고의적으로 타락시키려는 악랄한 수법이라 주장합니다. 이런 악의에 찬 주장에 대해 광고 전문가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브라이언 케이의 저서는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마치 극비인 것처럼 과대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합니다. 광고에 성적인 이미지들을 덧붙이면 매출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는 광고인들과 소비자들의 암묵적인 합의라는 것입니다. 광고주들은 매출을 올릴 수 있어서 좋고, 소비자들은 공개적으로 성적 이미지들을 즐길 수 있어서 좋은 것이지요. 광고 제작자들은 어떻게 하면 위험 수위를 넘지 않으면서도 성적 분위기를 물씬 풍길 수 있을까 연구를 거듭하지만, 이는 잠재의식 메시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잠재의식 메시지 효과가 존재하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일부 소비자 단체가 주장하듯, 우리가 끊임없이 이런 메시지에 노출되어 세뇌되고 있는 것일까요? 이와는 반대로 자기계발 코칭을 전문으로 하는 많은 영리 기업들은 수면 중에 듣는 녹음테이프라든가, 컴퓨터 화면에 반복적으로 성공을 암시하는 단어를 제시해주는 잠재의식 메시지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면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이 열을 올리며 선전하는 것처럼 자기를 개조하고 동기를 유발하는 데 효과가 있을까요? 소비자 단체들은 잠재의식 메시지가 일반인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잠재의식 메시지에 대한 과대선전 역시 일반인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과학적 사실뿐입니다. 잠재의식 메시지 효과는 결코 인간의 감정과 행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줄 만큼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논란은 항상 논란 자체를 위해 영속되며, 동시에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심리법칙마저도 사람들은 항상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것이 맞다 저것은 그르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과학적 근거가 없거나 부족한 심리 이론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비판적 의식이 필요한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