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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극단화 현상 [ Group Polarization ]

대학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비싸져만 가고, 이를 댈 능력이 없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고민과 울분이 점점 깊어만 가는 와중에서 갑자기 ‘반값 등록금’ 논쟁이 튀어나와 전국이 시끌시끌해지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서울시와 서울시 의회가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 조례를 둘러싸고 참교육 실현이다 망국적 포퓰리즘이다 해서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예상치 못하게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이 내놓은 방침이라 놀라움이 더합니다. 그런데 ‘반값 등록금’ 방침이 제안된 이후 각 이해 집단의 주장은 점점 더 극단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애초에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의중은 소득 수준이 하위 50% 이하인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원을 대폭 늘려 등록금의 50%까지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귀에 솔깃한 어구로 치장하다보니 마치 모든 학생들의 등록금을 반값으로 깎아준다는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렇지 않으면 ‘반쪽’ 등록금 정책일 뿐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민주당에서는 한술 더 떠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전면적 무상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당장 올해 추경예산에 5,000억을 추가 편성해야 한다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대학생들은 모처럼 언론의 급물살을 탄 등록금 인하의 가능성이 흐지부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한편 소득 수준만을 고려했던 원안에 B학점 이하는 제외하자는 추가 조건이 붙자, 야권은 카이스트 학생들의 잇단 자살 사건을 잊었느냐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여당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이렇듯 등록금 인하를 지지하는 쪽이 극단으로 치우치는 가운데, 반대 주장 역시 점점 더 격해지고 있습니다. 제대로 등록금을 내도 반값만큼의 교육밖에 하지 못하는 기준 미달의 대학들을 먼저 구조 조정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대학들은 대학 지원금을 깎는 등록금 인하 논의는 앞뒤가 뒤바뀐 이야기라며 흥분하고 있습니다. 귀에 익은 망국 포퓰리즘 논의를 넘어서서, 심지어는 초중고교에 들어갈 재원을 대학에 집중시키는 것은 대학생 표를 의식한 정치 공작이라는 목소리에서부터, 등록금을 낼 형편도 못 되는 학생이 애초에 왜 대학을 가려고 했느냐는 냉소적인 비판도 있습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라 등록금이 싸지면 큰 부담이 줄 것 같아 기본적 원칙에 대해서는 대환영입니다. 그러나 언론에서 연일 중계되는 양측의 한 치 양보도 없는 상호 비방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 논란이 국민들을 분열시킬 만큼 중요한 사안인지 의아스럽습니다. 1961년 MIT 심리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제임스 스토너(James Stoner)는 ‘모험적 이행(risky shift)’이라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물어보면 중도적이고 온건한 의견을 지지하던 사람이라도, 이들을 모아 집단으로 논의를 진행시키면 좀 더 과격한 의견으로 수렴되고 좀 더 위험한 결정이 내려지는 현상입니다. 전당대회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후보의 지지도가 갑자기 급상승하면서 대표로 선발된다든가, 온라인상에서 특정 연예인에 대한 비방이 도를 지나치면서 집단적 폭력으로 비화되는 것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후 이어진 세르주 모스코비치(Serge Moscovici)와 마리사 자발로니(Marisa Zavalloni)의 연구에서 모험적 이행은 집단 극화 현상의 일부분임이 밝혀졌습니다. 즉 모험적 이행도 있지만 온건 보수화도 그만큼 흔하다는 뜻이지요. 중요한 것은 논의에 참여한 사람들의 의견이 애초에 어느 쪽이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찬성 쪽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은 상태에서 논의를 시작했다면 논의 결과는 만장일치 찬성 등의 과장된 형태로 치우칠 것이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은 상태에서 논의가 시작되었다면 투쟁도 불사한 결사반대 쪽으로 흐를 것입니다. 이렇듯 애초의 의견이 집단적 논의를 통하면서 극단으로 강화되는 현상을 ‘집단 극화 현상(Group polarization)’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집단 역학 때문에 쌍방 간의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게 되고, 민족 간, 인종 간의 극심한 편견이나 증오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집단이 모여 논의를 하는 취지는 개개인의 극단적 의견 속에서도 합리적인 일치점을 찾자는 것인데, 만약 집단 극화 현상이 보편적이라면 논의라는 것 자체의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연구자들은 이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오래 고민했습니다. 과연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맞장구를 치다보니 점점 의견이 극단으로 흐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과 반대 의견을 지닌 사람과 치고받고 싸우다보니 점점 더 의견이 갈라서는 것일까요? 심리학자인 조지 비숍(George Bishop)과 데이비드 마이어스(David Myers)는 역시 실험을 통해 전자가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과만 의견을 나누며, 그러는 사이에 점점 더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일 여유와 유연성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집단 역학이란 개개인의 심리를 압도할 만큼의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집단을 끌어가는 지도자는 이러한 현상을 영리하게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집단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부서의 장들은 항상 모임에서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격려하지만, 사실은 리더라는 위치를 이용해 남보다 약간 더 큰 목소리를 냄으로써 소수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직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분열이 발생합니다. 각각의 소그룹은 그들끼리만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고 다른 그룹에는 귀를 닫아버림으로써 분열과 대립이 점점 더 심화됩니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자신과 정반대 입장에서 사안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균형 감각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반대파의 존재를 거추장스럽게만 여길 게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반대파가 없다면 집단의 의견은 아무런 제동장치 없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우칠 것입니다. 반값 등록금 논의든 복지 포퓰리즘이든 극단적 대립에 몰두하는 현 세태를 보면서, 항상 가운데 길을 모색하는 제3의 목소리도 나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