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경우에 가장 뜨거운 인간애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상대를 위해 내 목숨이라도 내놓을 만큼 사람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은 어떨 때 찾아볼 수 있을까요? 개인적 체험을 통해 말씀드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로선 다만 다양한 영화나 소설 등에 등장하는 공식과 같은 이야기만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1998년 개봉된 영화 〈딥 임팩트(Deep impact)〉는 전형적인 재난 영화입니다. 영화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의 모든 인류와 문명이 일시에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는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불과 4개월 후에 거의 동일한 소재를 다룬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아마겟돈(Armageddon)〉에 밀려 한국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겐 그중 한 장면이 유난히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정치부 기자인 여주인공 제니는 정부가 혜성 충돌의 가능성을 1년여 전부터 국민에게 숨겨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혜성은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정면충돌을 막지 못하면 전 인류가 순식간에 멸망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혜성의 한 조각이 대서양에 떨어지기 직전, 주인공 제니는 헬기를 타고 탈출하는 대신, 어렸을 적 고향 집에 머무르고 계신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오래전에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아버지와 딸, 그들은 서로에 대한 수십 년간의 감정적 앙금을 털어버리고 서로의 품 안에서 최후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거대한 쓰나미는 이들을 휩쓸어갑니다. 영화에선 최후의 순간에 핵폭탄으로 혜성을 조각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결국 인류의 멸망을 막아내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기억 속에서는 오랫동안 서먹했던 부녀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가슴 저린 장면만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대재앙을 맞이한 인간들이 비로소 서로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확인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제 감정을 자극하여 뭉클한 감동과 함께 위안을 선사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공동으로 맞이한 재난이나 위기는 사람들을 가깝게 이끄는 것 같습니다. 불안하면 할수록 우리는 어머님의 품을 찾듯 서로를 향해 다가갑니다. 마치 고슴도치 새끼들이 가시에 찔려가면서도 살갗을 비비며 체온을 나누려 하는 모습 같다고 할까요. 1959년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섀처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입증하기 위해 영리한 실험을 행했습니다. 섀처는 실험을 위해 여대생 자원자를 모집했습니다. 피험자들은 ‘Gregor Zilstein’이라는, 이름조차 무시무시한 느낌을 풍기는 정신과 의사(물론 가명을 쓴 연구자입니다)에게서 실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 이 정체 모를 정신과 의사는 그들이 전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며, 비록 영구적인 장애는 입지 않겠지만 그 충격은 상당할 것이라며 겁을 줍니다. 또한 실제로 전기 충격 기구를 보여주면서 불안을 자극합니다. 의사는 또 다른 그룹에게도 역시 전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하지만, 이번에는 기껏해야 간지러움을 느낄 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렇듯 불안도가 높은 상황과 낮은 상황을 만들어놓고 나서, 개개 피험자에게 대기실에서 다른 피험자와 함께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혼자 조용히 기다릴 것인지를 선택하게 합니다. 결과를 보면 불안도가 높은 상황에서는 피험자의 63%가 남들과 함께 기다리겠다고 선택한 반면, 불안도가 낮은 상황에서는 그 절반인 33%만이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은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남들과 함께 있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섀처와 동료들은 몇 가지 후속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불안감이 높은 상황에서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피험자들과 함께 기다리는 상황과, 실험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기다리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불안이 높아져도 자신과 동일한 처지가 아닌 사람들과는 굳이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동일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기다릴 수 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반수 이상의 피험자들은 혼자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들을 종합하면 첫째, 사람들은 불안한 상황에 처할수록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둘째, 이들이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은 함께 모여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함이 아니며, 그보다는 함께 있음으로써 서로 위안을 받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함입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위기에 처하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없는 이기심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는 평상시의 시민들도 공동의 적을 만나면 갑작스레 단합되며, 지도자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합니다. 자원 고갈이나 환경 문제, 빈부 격차와 경제적 불안정 등과 같은 공동의 위협에 처해 있는 현대인들 역시, 섀처의 이론을 적용한다면 인간애와 동지애로 똘똘 뭉쳐져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공동의 위기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일까요? 섀처가 말한 친화 욕구는 서로 동일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동일한 처지가 아닌, 나보다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느낀다면 오히려 다가서는 게 아니라 피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서로 나누고 싶은 만큼 동시에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창피당하는 것을 꺼리며, 또한 자기 혼자만 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분노합니다. 그래서 함께 밤샘농성을 하는 동지들 사이에서도 반목과 대립이 끊이질 않으며, 공동의 적을 만난 상황에서도 경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려는 본능이, 공동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 간의 친화도 가로막게 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퍼집니다. 그러나 해결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자신이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고, 가장 불안하고 두렵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일 것입니다.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이 서로 간의 장벽을 허무는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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