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보면 두고두고 해석의 갈등을 일으키는 대목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형인 카인과 동생인 아벨은 각각 여호와에게 제물을 드립니다. 형은 농사를 짓는 자의 조상으로 땅의 소산을 드렸고, 동생은 목축업을 하는 자의 조상으로 양 새끼를 드립니다. 그런데 대체로 유목 생활을 하던 유대 족속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여호와는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신 반면 카인의 제물은 거부하십니다. 이에 질투를 느낀 카인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이를 추궁하는 여호와에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고 오히려 대듭니다. 결국 카인은 여호와로부터 추방당하나, 여호와는 카인의 이마에 표시를 주시고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일곱 배나 받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왜 하나님은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죄를 짓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은 하나님 아니셨나요? 또한 왜 선한 아벨은 죽었고 카인은 살아남았을까요? 하나님은 카인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왜 이마에 표시를 해서 보호해주셨던 것일까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왜 하나님은 아벨의 후손이 아니라 카인의 후손을 퍼뜨리셨던 걸까요? 여호와와 카인, 아벨의 이야기는 그대로 우리 가정에 적용되며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차지하려 애쓰는 형제간의 질투와 경쟁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흔히 ‘카인 콤플렉스’라고 칭합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유교 사상은 뒤집어 보면, 수도 없이 일어났던 형제간의 반목과 질시를 막기 위한 이데올로기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는 카인과 아벨 이외에도 이삭과 야곱이 장자권을 놓고 속임수를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장자 상속(primogeniture) 전통은 로마 시대에는 오히려 흐지부지되는 듯했으나, 중세 봉건 시대에는 더욱 강화되어 영주들은 모든 영토를 장자에게만 물려주는 원칙을 고수했고, 동생들은 큰형으로부터 재산을 분할받거나 의견이 안 맞으면 조상의 터전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러니 형과 동생이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잦았으며, 배신과 암투가 난무하였습니다. 장자 상속권은 아직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많은 법정 다툼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도 형제끼리의 반목은 물론, 형수와 시동생, 시누와 올케, 동서들 간의 다툼이 심각하여 나이 든 부모가 눈물을 쏟게 만드는가 하면, 낯모르는 사람보다 더 원수처럼 등 돌리고 살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갈등의 원인은 정당한 ‘내 몫’을, 형이 또는 동생이 나로부터 빼앗아 갔다고 여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형제들은 종종 “내가 그 애보다 뭐가 못나서”라는 말을 씁니다. 즉 한배에서 났으니 서로 능력도 자격도 동등하다는 뜻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도 사람인지라 어느 한 자식이 더 마음에 들기 마련이요, 예뻐하는 마음도 한 자식에게 치우지기 쉽습니다. 형제는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만,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서로 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능력을 타고난 나의 판박이들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에서 내가 배제될 때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 형제 살상의 비극은 바로 이런 심리에서 비롯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도 아벨은 사실 카인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유령, 혹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아벨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카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야기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아벨은 카인의 마음에 질투와 분노만 불러일으켜놓고, 그 자신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렸지요. 아벨이 카인의 내면의 적이었듯이, 카인의 후예인 우리 모두 내면의 아벨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꼭 형제자매가 있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운명은 나보다 하나도 잘난 구석이 없는 저놈에게 부와 명예를 베풀고, 내게는 아무런 자비도 베풀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모든 분들은 아벨을 살해했던 카인의 분노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왜 똑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면서도 그렇게 서로 반목하고 전쟁까지 불사하는지 의문시합니다. 그러나 서로 간의 모습이 닮았을수록, 서로 내게 돌아올 하나님의 축복을 상대가 뺏어갔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억울함과 분노가 극에 달합니다. 카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남을 남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나의 연장으로, 나의 분신으로 생각하는 자는 상대와의 질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원천적인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부서에서 경쟁자로 일하면서 내가 저 친구보다 못한 점이 없다고 자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상사의 눈에 저 친구가 간택되었다면 아마 여러분의 카인 콤플렉스는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가만 생각해보십시오. 카인과 아벨은 피를 나눈 형제였지만, 저 친구와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내가 그보다 못난 게 뭐야”라고 소리 지르기보다는 ‘내가 그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겠지요. 그와 나를 동일시하고 똑같은 사랑을 경쟁적으로 구하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만큼 서로 다른 사랑을 구해보는 것이 아마 카인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해답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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