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잔인하게 묘사된 신은 누구일까요? 툭하면 벼락으로 신이건 사람이건 괴롭혔던 제우스일까요? 아니면 자신보다 길쌈 실력이 뛰어나다는 데 앙심을 품고 여인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신시켜버린 아테네일까요? 그러나 자기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이빨로 뜯어 삼켜버린 크로노스보다 더 잔인하고 악독한 신이 있을까요? 갓난아기의 가슴을 물어뜯는 사악한 노인으로 묘사된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그림이나, 아이의 머리부터 깨물어 삼켜버리는 실성한 악마로 그려진 고야(Francisco Goya)의 그림에서 그 섬뜩함은 극에 달합니다. 크로노스는 다름 아닌 ‘시간’입니다. 고대 사람들도 시간만큼 잔인한 것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죠. 모든 명예와 영화도, 대제국의 웅장함도 시간 앞에선 속수무책입니다. 폐허가 된 옛 도성(都城)을 방문했을 때 고대인들이 느꼈던 무상함은 자식을 삼켜버리는 잔인한 신의 이미지로 변모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시간을 두려워했던 이유가 단순히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면 그렇게 끔찍한 이미지로 묘사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영웅으로 죽으면 영혼은 엘리시움(Elysium)의 들판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는 영예롭게 죽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겼지요. 그렇다면 죽음이 아니었다면, 시간을 그렇게 두렵게 생각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권력도 영예도, 아름다움이나 평화도 그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연인들이 속삭이는 불멸의 사랑 역시 한 철을 넘기기 전에 시든 꽃잎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여전히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두 연인들조차 사랑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식어버렸는지 당혹스럽기조차 합니다. 사랑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영원한 사랑의 불가능성을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서 찾습니다. 어떤 동물도 고정된 파트너에게 지속해서 성적 욕구를 느끼지는 못합니다. 만약 사랑을 성적 욕구와 동일시한다면 한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을 바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고정된 대상에게는 성적 욕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식어버리지만 대상이 바뀌면 새로운 성욕이 돋는 현상’을 쿨리지 효과라고 합니다. 이미 영장류는 물론 쥐와 같은 설치류에서도 이 현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이 되었으며,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일의 심리학자인 디트리히 클루스만(Dietrich Klusmann)은 2002년 19세에서 32세까지의 성인 남녀 1,865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랬더니 남성은 오히려 시간이 지나도 파트너와 잠자리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별로 줄지 않는 반면, 여성은 급격히 감소하여 8년이 지나면 20%의 여성만이 남편과 자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쿨리지 효과가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것이죠. 진화심리학자들은 특히 여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우선 지구 상의 모든 동물 중 일부일처제를 시행하는 동물은 단 3%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애초에 일부일처제란 사회적 제도일 뿐이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입니다. 좀 더 섬세한 설명은 역설적으로 여성이 남편을 영원히 곁에 두기 위해 성욕이 떨어진다는 학설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몇 가지 독특한 성적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아이가 성장하여 독립하는 데 무척이나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수컷들은 아이를 수정만 시키면 본분을 다하지만, 인간 아버지들은 아이가 독립할 때까지 양육을 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만약 아버지들이 아이를 잉태만 시켜놓고 사라져버린다면 여성으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죠. 또한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뚜렷한 발정기를 갖고 있으며, 이 기간에는 광적으로 성행위에 빠져듭니다. 비비 원숭이는 발정기 때 하루에 100회 이상 교미를 한다고까지 합니다. 반면 인간은 발정기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는 여성이 언제 발정기인지를 모를뿐더러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동물 암컷들은 본능적으로 교미가 반복되면 수컷이 자신에게 흥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별 걱정 없습니다. 이번 발정기와 다음 발정기 때의 파트너는 바뀌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경우 그래서는 아이를 안정되게 키울 수가 없습니다. 생리 때마다 남편이 바뀌게 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인간 여성이 발달시킨 전략은 남편에게 잠자리를 드물게만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남편이 설령 불만족스러워 할지라도 성적 매력을 최대한 오래 끌어감으로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일종의 신비 전술을 펴는 것이지요. 클루스만이 발견한 또 다른 결과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합니다. 여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과의 잠자리를 꺼려하지만, 대신 남편에게 다정히 대해주고자 하는 마음은 더 깊어진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는 성적 매력으로 남편을 붙들어두었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다정함과 포근함으로 남편을 매료합니다. 체코의 위대한 작가인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역작 《불멸》에서 이런 제안을 합니다. 청년이었을 때의 섹스는 말이 필요 없이 자신의 육체적 능력을 과시하는 데 그칩니다. 그 후에는 사랑을 갖가지 수사법을 빌려 말로 표현해야 할 단계에 도달합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가선 인류애라는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때 가서는 다시 한 번 말이 필요 없어지고, 또한 나와 내 반려자라는 구분도 없어집니다. 모든 인간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신비에 빠지게 된다고 쿤데라는 썼습니다. 인간이라고 해서 쿨리지 효과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런 조건을 이용해서 더욱 깊은 애정과 영적인 동행을 가능케 해왔습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권태기에 빠져 고민 중이시라면,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의 압제에 미리부터 불안감을 느끼신다면 우리가 가진 또 다른 영적 능력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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